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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름

himimi 행복나눔 2025. 5. 20.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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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가까이 있으면 잔소리를 하게 되고 멀리 있으면 보고 싶은 존재이다.


어린 눈에도 엄마는 미인이었다. 나는 엄마를 닮지 않아 속상했다. 엄마가 학교에 방문할 때면 나는 어깨가 으쓱했다. 엄마를 닮았다면 외모에 자신감이 생겼으련만 자신감이 없었다.

엄마는 맏딸이라고 어릴 적에 과외도 시켰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 할 때쯤에 과외가 불법이 되어 과외를 할 수 없었지만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학교 선생님보다 괴외 선생님이



엄마는 사회성이 좋아 학교 담임선생님과 과외선생님과도 허물없이 친했다. 그런 엄마와는 반대로 나는 집에서는 외향적이고 밖에서는 내향적이었다.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가 사 남매를 키워 주었고 엄마는 식당과 액세서리 장사를 했다. 늘 바쁘게 일만 하는 엄마와 대화를 하기보다는 외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할머니 기억이 많았다.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는 살았지만, 자식들과 소통을 많이 하지 못해서 아쉬울 때가 많았다. 돈만 벌어서 자식들 맛난 거 사주고, 용돈만 주는 엄마, 자식의 고민이나 학업 성적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일기장에 고민을 쓰고 엄마가 읽어 보기를 기대했었다.



외할머니는 전쟁 때문에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20대에 세 자매를 홀로 키우셨다.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느라 엄마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것이 한이 되어 맏딸인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엄마는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되어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늘 말했다.



엄마의 생활력 하나는 그 누구도 못 따라간다. 맘껏 쉬어 본적도 없이 어느새 노인이 되어 버렸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까다로운 남편 비위 맞추고 사느라 힘들었는데, 늘그막에 아버지가 치매가 심해졌다.

너무 힘들어서 울고 계신 엄마를 설득해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엄마는 매일 아버지를 보러 요양원으로 갔다. 요양원에 가신 후 2년이 지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오래 사실 것 같았던 건강한 사람이 먼저 하늘나라로 갈 때가 있다. 아버지 생신을 맞아 딸이 사 온 케이크를 맛있게 드셨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다 잊어도 자식들 이름과 얼굴은 기억했던 아버지.


아버지와 엄마는 성격이 정 반대였다. 나는 아버지의 외모와 성격을 똑 닮았고, 두 분이 싸우면 맏딸인 나만 아버지 편을 들었다. 엄마는 아버지와 성격 차이로 잘 싸웠지만 막상 아버지가 없으니 무척 외로워하고 힘들어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딸에게 전화해서 "넌 엄마한테 전화도 없니?"가 버릇처럼 되었다. 딸은 듣기 싫었고 엄마가 너무 이기적으로 보였다. 시집간 딸이 힘들 땐 들여다 보지도 않다가 엄마가 힘들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종종 전화를 해서 전화도 없다고 서운해 한다. 맏딸은 힘들 때도 부모에게 손 한번 내밀어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알아서 도움을 주면 몰라도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았다.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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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엄마는 자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살던 아파트를 팔고 큰아들과 함께 살기로 했다. 큰딸인 나에겐 말 한마디 없이 곁에 사는 맏아들과 의논하고 다른 자식들 의견을 무시했다. 그때는 나도 직장생활에 무척 바빴고 힘들게 살고 있었다. 엄마도 바쁘게 살다가 보니 멀리 사는 맏딸은 생각도 않고 가까이 사는 맏아들만 의지하였다. 엄마는 맏아들이 큰 아파트 평수를 늘려 이사할 때 아파트 판 돈 일부를 보태어 합가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들 가족과 함께 살았으나 몇 년 안 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는 무조건 자식을 믿고 의지하려고 하지만, 막상 같이 살다 보면 서로가 쉽지 않은 법이다. 가족은 함께 하다 보면 소중함을 모를 때도 있다. 서로 떨어지면 그리운 존재이다.



엄마가 맏딸의 집에 온 것은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한번 오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맏아들 가족과 갈등이 생기면서 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살다가 보니 아버지가 서울 요양원에 계실때는 자주 가보질 못했다. 4년 전부터 엄마는 맏딸 집에 오면 한두 달 계시다가 서울 아들 집으로 가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서울에 갈 때도 딸 집에 올 때도 옷 보따리를 들고 반복하며 살고 있다. 옷이 뭐 그리 중요한지 세 보따리를 들고 다닌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엄마는 똑같은 행동을 하며 되풀이하고 고칠 생각이 전혀 없다. 엄마와 살다 보니 아버지와 그토록 안 맞은 이유를 맏딸과 맏아들은 알게 된다. 엄마만의 나쁜 행동과 버릇들이 지금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 그래서 아버지도 힘이 들었겠구나 싶을 때가 있다.



엄마 젊을 때는 가족들 때문에 친구들 모임이나 여행도 못가고 돈만 벌고 살았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큰돈은 아버지가 벌어서 사 남매를 가르쳤지만 소소한 생활비와 자식들 뒷바라지는 엄마가 다 해주었다. 엄마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불평도 없이 눈만 뜨면 일하러 부지런히 나갔다. 난 엄마가 한글 받침을 모르는지도 모르고 나의 일기장을 보고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랬다. 엄마가 장사를 할 때 돈 계산을 너무 잘해서 어느 정도 아는 줄 알았다. 한글을 전혀 모르진 않았지만 받침이 있는 글을 몰랐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았다. 엄마는 노년이 되어서야 서울에서 노인 대학을 다니면서 한글 받침을 배웠다.



나는 엄마의 생활력으로 부요하게, 고생 없이, 내 맘대로, 살았던 것만 같다. 엄마는 노인인데도 자기관리가 철저하여 얄미울 정도이다. 며느리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는 같은 시간에 기상하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잠자고, 걷기 운동과 놀이터 운동기구를 한다. 난 엄마 나이가 되었을 때 저렇게 운동하고 저렇게 몸이 빠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엄마가 오면서 첫해는 아주 친절하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짜증도 내고 잔소리도 심해졌다. 엄마는 딸이 한번 말하면 이해를 못하고 엉뚱하게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점점 인지기능이 떨어지고 있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힘들 때가 많다. 실수를 하면 사사건건 거슬리고 노인이 되어 버린 엄마를 잊어버리고 화를 낸다. 엄마는 아들 집에서도 딸 집에서도 일을 저지르면 미안하다 말하기 전에 '내가 안그랬다' '나는 모른다'라고 한다. 뻔한 거짓말과 우기는 통에 이것이 인지 부족인지 거짓말인지 착각할 때도 있다. 딸집에 오면 해마다 치매안심센터에 가서 검사도 해마다 하고, 건강검진도 하고, 약도 타러 같이 간다. 딸은 엄마가 가끔 기억을 못할 때마다 두렵고 무서워진다. 엄마가 드라마 기억을 못하시거나 방금 한 말을 잊어버리면 엄마가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 역시도 주방에 국그릇이 없다고 엄마가 치운거 아니냐고 물으면 내가 냉장고에 뭘 담아두고 엄마를 의심하기도 한다. 때로는 무섭다

엄마 나이에 난? 난 딸도 없는데 누가 날 지켜주나? 싶은 생각도 든다. 엄마는 내가 사소한 일로 잔소리를 하면 듣기 싫어서 소리 지르고 끝내 싸운다. "너랑도 못살아" 하며 "서울에 가야지" "너도 며느리랑 못살아 ~ "그렇게 잔소리 하는데" "손주oo한테 이를거야 나 구박 한다고~" 하며 염장을 지른다. 싸울 때마다 반복하는 말을 하면서 4년을 우리 집에 왔다. 아들 내외와 싸우면 딸네 오고 딸이랑 싸우면 아들 집에 가고 말이다.





딸은 엄마가 나쁜 말을 반복할 때마다 서울에서 아들이랑 살라고 하여도 그때뿐이다. 끝까지 아들 며느리랑 살라고 하고 오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딸도 엄마랑 함께한 4년의 정으로 그리워진다. 못 배우고 잘 배우고 탓이 아닌데 엄마는 자식에게도 선을 넘는다. 노인과 함께 살아 본 사람만 아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엄마의 선택과 엄마의 말로 인해 형제간 우애도 금이 갔는데도 본인은 모른다며 기억을 못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엄마의 잘못된 행동과 선택에는 기억이 희미해진다. 딸집에 올적마다 사소한일로 싸우고 삐지면서 4년째 함께하고 있다. 엄마를 존중해주고, 이해하고, 부드럽게, 말해야 하는데 가족이라 너무 힘들다. 노인 형태의 체형으로 변해가는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아프고, 엄마가 운동을 가서 안 오면 어린 시절 엄마가 아이를 기다리듯 창문 너머로 운동하는 엄마를 쳐다본다. 걸을 때 등을 쫙 피고 걸으라고 잔소리 해도 자꾸 굽어진다고 한다. 엄마는 애증관계이면서 항상 마음이 짠하다.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에 맛난거 많이 해주고 맛난 요리도 많이 사주려고 한다. 엄마가 서울에 가면 너무 허전하고 그리웠다. 엄마가 없는 방에서 "엄마" 하고 외쳐 보기도 한다. 막상 엄마가 없으면 빈 자리가 크다. 엄마에게 불안했던 요소들이 악영향을 미친것 같아 딸로서는 마음이 아프다. 엄마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도 없이 맏딸 집에 머물며 한탄하는 엄마가 보였다.



딸집으로 주소를 옮기기까지 4년이 걸렸다. 엄마도 나도 함께 산다는 것에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더 이상 엄마를 서울에 오가며 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주소를 옮겨 왔다. 엄마는 서울에 가면 오히려 엄마가 반찬을 해서 드시거나 친구들이랑 외식을 한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속상했다. 노인도 반찬을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며느리가 있는데 대접도 못받는게 속상했다. 딸과 며느리 차이인가? 줄건 아들 다 주었지만 그래도 딸은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도 외할머니에게 잘했다.



모든 선택에 원망하지 말고, 후회하지도 말고, 앞으로의 삶에만 집중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시간이 있을 때 엄마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엄마의 보호자로 책임을 다해서 살고자 한다. 엄마는 내 잔소리는 듣기 싫어서 흉을 보고 내가 해주는 밥과 반찬은 맛있다고 칭찬한다.

맏아들에게 준 돈을 맏딸에게 주었다면 난 과연 엄마에게 더 잘하고 있을까? 성격 차이나 생활습관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도 엄마를 호강시켜 주었을 것이다. 왜 부모들은 맏아들만 아는 걸까? 딸도 어려운 결정을 내렸는데도 엄마는 서울에 미련을 못버리고 있고 짐 정리도 못하고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조금 남아 있는 통장도 서울 아들 집에 숨겨 두고 있다. 딸도 못 믿는 것 같아 가끔 속상하고 화가 난다.이쯤이면 딸에게 맡겨도 딸은 절대 쓰지 않을건데 정말 서운하기도 하다. 엄마는 집을 판것에 후회해도 소용없다. 남은 인생 잘살고 행복하게 근심 없이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요즘에는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라서 노후가 걱정이 된다. 엄마와 딸은 닮는다는데 정말 안 닮고 싶은 것도 많은데도 닮는게 신기하다.





엄마라는 이름은 서운하면서도 감사하고 사랑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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